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피해자 행세 (문단 편집) ===== [[베트남]] ===== [[베트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일시적으로 뭉개고 쳐들어온 일본군을 환영했으나, 국부인 [[호치민]]은 [[박헌영]]을 비롯한 [[한국인]]들을 만나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처음부터 일본도 프랑스 못지않은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견제했다. 호치민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일부 베트남 독립 세력이 그래도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일본을 좋게 바라보자, 호치민은 분노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던가? 프랑스나 일본이나 차이가 없음을 알라!"''' 라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애초에 베트남은 반불 식민 투쟁 시기부터 중국, 소련 등지를 통해서 다른 아시아 각지의 혁명가들과 교류를 유지했고, 이 와중에는 많은 조선인 독립 운동가, 망명객들과도 비공식적인 친분이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식민지 초기부터 판 보이 쩌우가 조선인들의 처지와 자신들을 같이 비교하며 한탄하는 시를 쓰는 등,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초기의 유생들과 후기의 사회주의자들 모두 일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뜻은 지금도 베트남 교과서에 남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한다. 무엇보다 베트남 국부인 호치민도 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 무장투쟁하면서 공산당 세력을 키웠다.[* 오히려 이 점에서 베트남의 불제강점기의 경험과 조선인들의 일제에 대한 인식은 점점 관련 논문이나 학계의 관심도 높아지는, 탈식민지주의 학계에선 나름 핫한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다. 구체적인 사료가 없을 시절에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에 대해 지나가듯 언급하는 모습이 종종 있어서 뭔가 더 커넥션이 있었을거라는 학자들의 심증이 최근 갈수록 호치민이나 다른 인사들 파리 거주 시절 조선 독립 운동가 망명객들과 구체적으로 만나며 교류했다는 사료가 새로 발굴되며 확인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호치민도 태평양 전쟁당시 중국 국민당과 미국의 보급을 받으며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 전을 벌였다. 심지어는 공산국가를 건국한 직후에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이때 경험한 실전경험은 훗날 월맹이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이렇게 강력하게 규탄한 까닭은 태평양 전쟁 시절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은 조선에게 그러했듯 베트남에게도 [[일본군]]의 각종 민폐세트와 더불어서 '''당연히''' 쌀을 강제로 수탈해서였다. 그러다가 1945년 수탈과 더불어 대기근이 일어났다. 당시 북베트남 인구는 1,000만 정도였는데, 일본군의 쌀 공출과 홍수-가뭄 크리로 온 흉년, 미군 잠수함 크리로 온 남부 베트남 쌀 수송의 난항은 기록적인 대기근으로 돌아왔다. 이 대기근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만 약 200여만 명에 달한다. 이 당시 일본군의 쌀 공출을 명령한 작자는 다름 아닌 [[기무라 헤이타로]]인데 당시에 버마 방면군 사령관이었지만 실권이 컸기 때문에 이런 짓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인들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넘쳤다. 때문에 호치민은 세력을 크게 늘렸고 일본 항복 직후 일시적이나마 베트남 전토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베트남인의 체험문학작품을 보면 쌀을 가져갈 때 "안 돼! 가져가지 마라!"라고 울부짖는 여인을 칼로 베어 죽이고 억지로 쌀을 공출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일본군 다운 행동일 따름이다. [[http://hyukjunseo.egloos.com/3118001|출처]] [[http://www.chosun.com/svc/news/www/viewArticle.html?id=200105180285|출처2]] 당연히 베트남 교과서에서는 이 시절의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베트민을 비롯한 반불 저항군이 일본군에게도 맞서 싸웠을 정도라 더 그렇다. 본격적인 미국과의 악연일 때도 이때는 일단 추락한 미국 조종사들을 구해주거나, OSS가 전술 교육, 물자 지원을 해 주는 등 협력 관계로 시작했다. 이 시절에 OSS가 베트남에 파견했던 미군 지원단, 군사 고문 등이 미국인들 치고 현지 문화에 빨리 적응하고, 베트민에게 좋은 인상을 주며 결국 1945년 8월 일제가 철수할 때 터진 베트남 8월 독립 혁명 때 명예 국빈으로 참석하는 등 좋은 무드를 형성했으나 냉전이 진행되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이 당시까지도 베트남은 공산국가였음에도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기를 원했는데 이유는 다름아닌 중국 견제 차원이었다. 당장 [[호치민]]이 제일 먼저 찾은 나라는 사회주의 동지인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여하튼 이 시절 일본의 착취와 약탈로 죽어간 베트남인들에 대하여 베트남 교과서나 언론, 책자로 분명하게 기재하고 일본을 비판하며 침략자, 학살자로서 분노한다. 이에 일본 극우들은 모른다는 변명과 부정만 하고 베트남 역사 교과서로 일본을 침략자로 비난하는게 한국과 중국 탓이라고 개드립을 하며 발광하지만 해당 나라 여론은 당연히 싸늘하다. 물론 후술하는 [[인도네시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지로 고생한 세월이 훨씬 길며 일본군이 떠나간 자리에 프랑스군이 복귀하면서 치열한 독립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제국주의 시대에 관해 일본보다는 프랑스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훨씬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